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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보내는편지

첫 忌日,아버지를 記憶함.
받는이 : 아버지
작성자 : 김 광 선 2004-08-07
나의 좋은 친구가 우리에게 말했다.

좋은 친구와 덜 좋은 친구를 구분하는 법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친구와 오지않은 친구라고...



세상은 우리에게 2분법으로 사는 법을 생활에서 터득하게 설명해준다.



세상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를 빨리 선택하게 하기위해서는

우리중 누군가가 빨리 세상을 하직할 것과 그 와중에 아들상주는 황망해 하지말고

좋은 친구를 변별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지라

아버지를 보내는 마지막 그자리에 있었거나 없었거나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책망하려고 한다.



'물리가 제일 쉬웠어요~'하는 좋은 친구의 아들은 우리 모두의 아들이고,

어제 첫 차로 진해에 아들을 해군에 입대시킨 또다른 좋은 친구는

290명의 아버지를 아들의 사물함에 챙겨 넣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오늘 일년 만에 천상에서 내려오셔서 즐거우실 것이다.

아들이 과연 좋은 친구와 덜 좋은 친구를 어떻게 가려 사귈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면서......



우리의 좋은 친구는 역시 별것 아닌 것으로 우리를 즐겁게하는 재주가 있다.



잠시

고민에 빠져서 좋은 친구와 덜좋은 친구를 구별하던 나는

이 여름에 남달리 더위를 못견뎌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좋은 친구 여럿은

여러 아버지와 여러 아들을 둔 덕에 청량한 여름을 보내고

덜 좋은 친구 서넛과 나는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들만을 찾느라 더위에 지치고.....



아버지는 우리모두의 아버지이고,

우리의 모든 아이들에게 우리가 한 아버지인것을.....

오늘,

아버지가 보고싶은 날에 깨닫는다.



************************* ^*^





오늘이

아버지의 첫 忌日이다.

역시 세월은 세월이다.

작년 이맘 때도 이렇게 무더웠던가?

엊그제 교회의 아는 옛 후배의 모친상을 다녀오면서 찜통 더위를 못견뎌서

웃저고리를 연신 벗어 제꼈던 걸 생각하며

작년, 나의 조문객께 송구스러웠다.



일흔일곱에 우리의 손을 놓으신 아버지.

맏이인 나하고 서른한살의 나이차이가 나니,

그때 풍습으로는 꽤나 늦으신 것이다.

아버지의 성격으로 애틋한 사랑(?)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닐 터인데 왜이리 늦으셨을까?



충남 고덕에서 태어나 열세살에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인 할머니는 광주리장사로 2남1녀를 키웠지만,

아버진 국민학교만 마치고 개성과 서울을 오가시며 고생만 하셔서

아마 내자식에게 가난만은 물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벌기 전까지는)

혼자 오랜세월을 살게 하였을 것이다.



해방후 곧 육군에 입대하고 전역해서

한국전쟁이 나자 다시 공군에 재입대하셔서 참전용사가 된 걸 보더라도

거처할 곳과 머무를 안식처가 궁하긴 궁하셨던 게다.



그럭저럭 보일러와 운전(그 당시엔 첨단업종임)으로 굶지는 않으셨고

여기저기 어른들을 잘 모셔서 수양아들 노릇도 하시다가

온양근처인 신창에서 학교선생이신 오빠를 뒷바라지 하면서

동네처녀들에게 자수와 길쌈을 가르치던 어머니를 만난 것은 최대의 행운이었을 것이다.



온양온천에서 신혼생활을 하셨을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그리고,

날마다 기름 때 묻은 작업복을 빠시는 어머니는 또한 얼마나 즐거우셨을까?



어머니는,

최근에 아들이 마련해 드린 새집에서

겨우 두 해를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시다고 못내 서글퍼하셨다.



영정앞에는

늘 새로운 과일과 즐겨하시던 청자담배(옛날 것 그대로를 어디선가 구해 놓으셨다)와 염주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매일 문밖을 넘나드시면서 여쭙는다.

'여보,내 시장에 다녀올께요~'

'당신이 좋아하는 큰아들이 왔어요~'



한 달에 두어번 안양의 어머니를 뵈올 때 마다 아버지를 이렇게 뵙는 것은 그래서 생활이 되었다.



아들이 군대에 갔을 적에도 어쩌다 찾아오는 아들친구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맞아들였던 어머니.



그뿐인가 내가 군대생활을 하던 40개월 내내 밥을 차려서

마치 새벽 첫 차로 학교에 가는 아들 배웅하듯이 살으셨던 어머니.

이러한 어머니를 평생 옆에 두고 살으셨던 아버지는

복중에 며느리가 해드린 제삿밥이 무척 설게 느끼셨을 것 같다.



아버지는

된장찌게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제사에는 그 음식을 올려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머뭇대다가 철상을 한뒤에

아버지하신 것처럼 된장에 고추장을 ,그리고 나물에 섞어 비벼먹으니

.............



서걱서걱,

목이 메인다.



일년사이 명절이야 몇 번을 지냈지만

첫 제사를 지내려니 몇일전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편치가 않다.



필시,

내 그동안 살아온 길이 문제가 있음이다.



아버진 우리의 어깨에서 내려오시며 삶의 무게를 덜어주시고,

편히 살게끔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아직도 할 말씀이 끝나지 않으셨던 게다.

여태 아버지는 우리 삶의 울타리 그 언저리에서 우리를 걱정 반,근심 반으로 애를 태우신게로다.



아버지.

제가 듣는 아들로부터의 '아버지'가 제가 부르는 '아버지'와 왜 이리 다른 것 일까요?

아버지,

이제는 편한 마음으로 저희를 지켜주시고 또 돌봐주세요.



저희 잘 살겠습니다.



이제는 해마다 아버지를 뵈올 때 좋은 일만 여쭙겠습니다.



아버지의 사진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시는군요?

그때가 좋은신거죠?



어머니 손을 잡고 신창국민학교 언덕을 넘으실 그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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