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릴 때. . .
- 받는이 : 아버지
- 작성자 : 큰아들 창영 2006-12-22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릴 때. . .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아버지란 말을 간절하게 불러본 적이 없다.
멋쩍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던게 큰 이유인듯 하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표현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나의 기억속에 아버지는 눈물이 많으셨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이 그리 어울리는 분은 아니셨다.
내 기억 한 편에 나의 아버지는 강인하셨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 생일케이크에 촛불 켜놓고 노래 불러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인지 요즈음도 그런 행사때는 아직도 왠지 어색하다.
온 가족이 괜찮은 곳으로 가족여행을 가 본 기억이 없다.
그럴만한 시간이 아버지에게 주어진 적이 없었기때문이다.
아버지는 노래를 꽤 잘 부르셨다.
그래서인지 나도 노래는 그럭저럭 부르는듯하다.
식구들이 모이면 항상 고스톱을 치자고 제안하셨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옹기종기 앉아 있기보다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게
보다 더 효율적이란 것을 알게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졸업사진을 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적은 대학교 졸업식때뿐이다.
그 사진이라도 있다는게 지금와서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귀찮기만한 간섭으로 들렸다.
그토록 강조하셨던 이유를 알게 된 때도 사회입문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버지의 모습은 투박스러운 측면이 많았다.
선이 굵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런 모습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더 정겹다.
부지런한 성품은 아버지의 육신을 가만히 있게끔 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건 집 밖에서건 무엇인가를 해도 하시는 분이셨다.
소위 먹고 살려는 힘겨운 노력이 그러한 근면함을 갖게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말 없이 이 곳 저 곳을 직접 살펴보던분이셨다.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나 직접 들여다보며 함께 고민해주던분이셨다.
사람이 부지런해야 친구 관계도 유지할 수 있다는걸 알게 해주셨다.
다른 집의 부모들처럼 자식들에게 해주지 못하는걸 많이 힘들어 하셨다.
내가 조금씩 세상의 벽에 부딪치게 될 때쯤 아버지는 말없이 지켜보실뿐이었다.
차선책을 생각해두시던 아버지는 생각이 많으셨던분이셨다.
생활의 쓰디 쓴 맛을 소주 한잔의 달콤함으로 달래시던분이셨다.
특별한 여가 선용 방법이 없으셨지만 한 잔의 술로써 만족하셨던분이다.
나는 아직 소주 맛이 쓰기만하다. 왜그런지 고민할 때도 있다.
평생을 운전대와 씨름하며 살아오신 분이셨다.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운전대에 앉으면 그렇게 편하다고 하셨던적이 있다.
어쩌다 운전할 일이 있을 때 아버지의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적이 있다.
불가능하다는건 알지만 아버지의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은 때가 많다.
아버지. . .
여유롭게 아버지를 떠올려 볼 수 있는 이 시간에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글로 쓰다보니 더욱 애틋해집니다.
보고싶습니다. 아버지. . .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아버지란 말을 간절하게 불러본 적이 없다.
멋쩍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던게 큰 이유인듯 하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표현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나의 기억속에 아버지는 눈물이 많으셨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이 그리 어울리는 분은 아니셨다.
내 기억 한 편에 나의 아버지는 강인하셨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 생일케이크에 촛불 켜놓고 노래 불러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인지 요즈음도 그런 행사때는 아직도 왠지 어색하다.
온 가족이 괜찮은 곳으로 가족여행을 가 본 기억이 없다.
그럴만한 시간이 아버지에게 주어진 적이 없었기때문이다.
아버지는 노래를 꽤 잘 부르셨다.
그래서인지 나도 노래는 그럭저럭 부르는듯하다.
식구들이 모이면 항상 고스톱을 치자고 제안하셨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옹기종기 앉아 있기보다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게
보다 더 효율적이란 것을 알게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졸업사진을 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적은 대학교 졸업식때뿐이다.
그 사진이라도 있다는게 지금와서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귀찮기만한 간섭으로 들렸다.
그토록 강조하셨던 이유를 알게 된 때도 사회입문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버지의 모습은 투박스러운 측면이 많았다.
선이 굵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런 모습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더 정겹다.
부지런한 성품은 아버지의 육신을 가만히 있게끔 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건 집 밖에서건 무엇인가를 해도 하시는 분이셨다.
소위 먹고 살려는 힘겨운 노력이 그러한 근면함을 갖게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말 없이 이 곳 저 곳을 직접 살펴보던분이셨다.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나 직접 들여다보며 함께 고민해주던분이셨다.
사람이 부지런해야 친구 관계도 유지할 수 있다는걸 알게 해주셨다.
다른 집의 부모들처럼 자식들에게 해주지 못하는걸 많이 힘들어 하셨다.
내가 조금씩 세상의 벽에 부딪치게 될 때쯤 아버지는 말없이 지켜보실뿐이었다.
차선책을 생각해두시던 아버지는 생각이 많으셨던분이셨다.
생활의 쓰디 쓴 맛을 소주 한잔의 달콤함으로 달래시던분이셨다.
특별한 여가 선용 방법이 없으셨지만 한 잔의 술로써 만족하셨던분이다.
나는 아직 소주 맛이 쓰기만하다. 왜그런지 고민할 때도 있다.
평생을 운전대와 씨름하며 살아오신 분이셨다.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운전대에 앉으면 그렇게 편하다고 하셨던적이 있다.
어쩌다 운전할 일이 있을 때 아버지의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적이 있다.
불가능하다는건 알지만 아버지의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은 때가 많다.
아버지. . .
여유롭게 아버지를 떠올려 볼 수 있는 이 시간에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글로 쓰다보니 더욱 애틋해집니다.
보고싶습니다. 아버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