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정사업본부 10회 보은의달 편지쓰기대회 은상 당선작
- 받는이 :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 작성자 : 유종환 2009-07-01
아버지께
아버지, 제가 운행하는 버스가 북한산 한 자락 우이령을 넘어 올때면 차창 밖으로 5월을 알리는 아카시아 꽃 향기가 창문 틈으로 물씬 들어옵니다. 두 줄로 길게 피어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영근 하얀 꽃들을 볼 때면 어릴 적 고향 집이 생각납니다. 창문을 열면 뒷산이 보였고 그 산을 가득메운 아카시아 꽃들이 저희 가족들의 마음을 환하게 해 주곤 했지요.
그 5월이 되면 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면서 늘 감사하다는 편지를 써서 함께 드리려 했는데 쓰다 지우다 하면서 정작 한번도 드린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적 초등학생이던 제 아이들이 이제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의젓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엊그제 어버이날 그 녀석들이 엄마 아버지께 카네이션을 달아주면서 "부모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길래 "뭐 감사의 편지 같은 것은 없냐?"고 농삼아 물어보았더니 쑥스러운 듯 웃고 말더군요. 그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아버지는 제가 자라면서 본받아 온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에게 늘 희망이었지요.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 "나처럼 고생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이름 석자도 잊으시고 언제나 묵묵히 자식들의 아버지로 자리를 지키시며 저희들의 뿌리가 되 주셨고 저희가 지탱하는 기둥이 되주셨습니다. 제겐 커다란 나무였던 아버지. 사춘기 시절 때론 삐뚤어진 저를 보면서도 속내를 감추시고 넓은 마음으로 감싸시며 용서하시고 저의 모든 것을 사랑하셨던 아버지. 시대가 아버지에게 떠 넘긴 가난함과 맞서며 평생 고단한 새벽길을 헤쳐나가시다 자식들에게 효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시고 서운한 마음 간직한 채 먼 길 떠나가신 내 아버지.....
불효자식을 용서 하십시요. 그리고 이승에서의 짐들은 다 내려 놓으시고, 아버지 이제 편히 쉬십시요.
고향을 떠나 리어카 행상에서 목수로 살기까지 썩은 가슴 쓸어모으면 숯덩이 보다 까말거라며, "그래도 밥 굶지 않고 너희들 공부 다 시켜 놨으니 이만하면 자랑이 아니겠냐!"고 크게 웃으셨던 아버지. 뼈마디 마다 못을 내리 치는 아픔이 있었는데도 병원에 검사 한 번 가자하면 "내 몸은 내가 잘안다."시며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통증을 감추시다 끝내 구급차에 실려가 깨어나지 못하신 아버지. 젊음이 사라져버린 적막해진 등을, 평생 가족들을 짊어지고 오시느라 푸른 멍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등을 그때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알았습니다. 쓰러지고 난 응급실에서 아버지를 짓누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를요.
아버지가 걸어왔던 그 길을 이제는 제가 아버지가 되어 걷고 있습니다. 때론 힘들고 지치기도 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저는 그 길에 나무도 심고 열매도 가꾸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해 왔던 것처럼요. 늘 새벽 같은 맑은 기운으로 힘내고 있습니다. 듬직한 가장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버스운전을 시작한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의 근면함을 보고 배운 덕으로 승객 분들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모신다는 사명감하나로 더러는 휴일도 잊은 채 성실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5월이 되니 살아 생전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가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쉬운 말인데 왜 그리 자주 못했는지 새삼 후회가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도 5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편지가 늦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사는 게 바빠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저만의 핑계이겠지만요. 시간 나는 대로 어머니 모시고 아버지계신 청아공원에 가족들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아버지 영정 앞에 바치며 마음속에만 간직한 채 평생 하지 못했던 말 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09년 5월 30일
불효자식 둘째 올림
아버지, 제가 운행하는 버스가 북한산 한 자락 우이령을 넘어 올때면 차창 밖으로 5월을 알리는 아카시아 꽃 향기가 창문 틈으로 물씬 들어옵니다. 두 줄로 길게 피어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영근 하얀 꽃들을 볼 때면 어릴 적 고향 집이 생각납니다. 창문을 열면 뒷산이 보였고 그 산을 가득메운 아카시아 꽃들이 저희 가족들의 마음을 환하게 해 주곤 했지요.
그 5월이 되면 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면서 늘 감사하다는 편지를 써서 함께 드리려 했는데 쓰다 지우다 하면서 정작 한번도 드린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적 초등학생이던 제 아이들이 이제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의젓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엊그제 어버이날 그 녀석들이 엄마 아버지께 카네이션을 달아주면서 "부모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길래 "뭐 감사의 편지 같은 것은 없냐?"고 농삼아 물어보았더니 쑥스러운 듯 웃고 말더군요. 그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아버지는 제가 자라면서 본받아 온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에게 늘 희망이었지요.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 "나처럼 고생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이름 석자도 잊으시고 언제나 묵묵히 자식들의 아버지로 자리를 지키시며 저희들의 뿌리가 되 주셨고 저희가 지탱하는 기둥이 되주셨습니다. 제겐 커다란 나무였던 아버지. 사춘기 시절 때론 삐뚤어진 저를 보면서도 속내를 감추시고 넓은 마음으로 감싸시며 용서하시고 저의 모든 것을 사랑하셨던 아버지. 시대가 아버지에게 떠 넘긴 가난함과 맞서며 평생 고단한 새벽길을 헤쳐나가시다 자식들에게 효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시고 서운한 마음 간직한 채 먼 길 떠나가신 내 아버지.....
불효자식을 용서 하십시요. 그리고 이승에서의 짐들은 다 내려 놓으시고, 아버지 이제 편히 쉬십시요.
고향을 떠나 리어카 행상에서 목수로 살기까지 썩은 가슴 쓸어모으면 숯덩이 보다 까말거라며, "그래도 밥 굶지 않고 너희들 공부 다 시켜 놨으니 이만하면 자랑이 아니겠냐!"고 크게 웃으셨던 아버지. 뼈마디 마다 못을 내리 치는 아픔이 있었는데도 병원에 검사 한 번 가자하면 "내 몸은 내가 잘안다."시며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통증을 감추시다 끝내 구급차에 실려가 깨어나지 못하신 아버지. 젊음이 사라져버린 적막해진 등을, 평생 가족들을 짊어지고 오시느라 푸른 멍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등을 그때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알았습니다. 쓰러지고 난 응급실에서 아버지를 짓누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를요.
아버지가 걸어왔던 그 길을 이제는 제가 아버지가 되어 걷고 있습니다. 때론 힘들고 지치기도 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저는 그 길에 나무도 심고 열매도 가꾸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해 왔던 것처럼요. 늘 새벽 같은 맑은 기운으로 힘내고 있습니다. 듬직한 가장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버스운전을 시작한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의 근면함을 보고 배운 덕으로 승객 분들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모신다는 사명감하나로 더러는 휴일도 잊은 채 성실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5월이 되니 살아 생전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가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쉬운 말인데 왜 그리 자주 못했는지 새삼 후회가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도 5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편지가 늦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사는 게 바빠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저만의 핑계이겠지만요. 시간 나는 대로 어머니 모시고 아버지계신 청아공원에 가족들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아버지 영정 앞에 바치며 마음속에만 간직한 채 평생 하지 못했던 말 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09년 5월 30일
불효자식 둘째 올림